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로다 히로키 (문단 편집) === [[패전처리 투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카프]]의 에이스로 === [[난카이 호크스]], 타카하시 유니온스, 다이에이 유니온스 등의 팀에서 타자로 프로생활을 했던 아버지 구로다 가즈히로(1924~2007)는 [[오사카]]에서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면서 아들들을 야구선수로 키우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2명의 아들 중 차남인 구로다 히로키가 투수로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구로다 가즈히로는 본인이 직접 [[리틀야구]] 팀을 만들고 감독을 맡으면서 아들을 가르치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극진히 뒷바라지를 하였다. 여기에 [[투포환]] 선수 출신이었던 어머니 구로다 야스코 씨도 아들을 엄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일화로 고교 야구부 여름합숙 시절엔 쉬지도, 먹지도 못 하면서 낮밤 가리지 않고 계속 운동장을 달려야 했는데 나흘째 되던 날 밤에 선배의 부모님이 운동장에 몰래 오셔서 "아침 일찍 돌아와서 다시 러닝 시작하면 괜찮지 않니?" 하시며 그때도 달리던 아들과 구로다를 집으로 데려가 그들이 훈련 내내 못 한 목욕과 식사를 제공하시곤 구로다의 집에도 연락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구로다의 어머니는 "감사하지만 우리 아들이라도 지금 학교로 다시 보내서 뛰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실 정도였다고 한다. [[파일:external/blog-imgs-61.fc2.com/2013041620580000.jpg|width=500]] 고교 시절은 '''3년간 후보'''라고 쓰여있다(...) --잘생겼다.-- 오사카의 야구 명문 우에노미야 고등학교에 진학하나, 재학시에는 주전에도 들지 못하는 무명선수였고 그나마 등판해도 [[패전처리 투수]]로서 등판하였다. 물론 일본 고교야구의 성지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이 덕분에 혹사가 심한 일본 고교야구에서 혹사를 별로 당하지 않아서 40대 이후까지 부상 없이 꾸준히 롱런할 수 있었다는 야구 관계자들의 말도 있다.] 본인은 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야구를 포기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2013년 방송 촬영차 모교를 방문했지만 야구부 고문선생님은 고교 시절의 구로다가 거의 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구로다가 대학 진학 후 직구 구속이 140km/h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 구로다? 이름을 잘못 안 거 아냐?"라고 말했던 건 기억에 남아 있다고 증언했다. >'''제작진''': (구로다 히로키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야구부 부장''' : 제 기억에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힘이 없었어요. 구로다가 센슈대학에서 140km/h의 공을 던진다고 했을 때, 그 구로다? 이름을 잘못 안 거 아냐? 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이 무명의 학창시절은 구로다가 메이저리그 생활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수 있게 만든 기반이었다.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을 평정하며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받았던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등은 고교 시절부터 당한 혹사로 메이저 생활 3년을 못 넘기고 부상을 당한 반면, 구로다는 타구에 머리를 맞았던 2009년을 제외하면 큰 부상을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메이저리거 생활을 하였다. 선수생활을 그만두려는 아들을 설득해 대학때까지 야구를 하기로 만든 아버지 카즈히로는 도쿄의 센슈대학에 진학하기를 권했다. 센슈대학은 과거에는 소속 리그였던 [[토토 대학 야구연맹]]에서 현재까지도 1부 리그 최다 기록인 32회 우승을 차지했던 강호였지만 1990년대 이후론 점차 팀이 약체화되면서[* 1989년 춘계리그 이후의 1부리그 우승 경력은 2015년 춘계리그 우승이 전부이며, 이후에도 다시 강팀의 자리를 되찾지 못한 채 1~2부 리그를 오가고 있다.] 1~2부 리그를 오가던 그저 그런 팀이 되었다. 그 덕에 무명인 쿠로다가 등판할 기회가 많았던 점도 있고, 연습구장이 대학야구의 성지 [[메이지진구 야구장]]이라서 스카우트들의 눈의 띄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고. 대학에 진학한 쿠로다는 많은 기회를 부여받으며 3학년때부터 [[에이스]]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힘이 붙어 구속도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150km/h의 구속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 결과 그 해 봄부터 동도쿄대학리그에서 하부리그를 전전하던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1996년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재정적으로 탄탄하고 순위도 높은 팀을 마다하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역지명'''[* 과거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에 있던 제도. [[에가와 스구루]] 사건 이후 '프로야구 선수에게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1993년 [[드래프트]]부터 도입되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같은 명문 구단들이 대형 유망주를 선점해버려 전력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약소 구단을 택한 쿠로다의 선택이 더욱 이례적인 이유. 이 제도는 '자유 획득 범위' '희망 획득 범위' 등의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2007년의 탬퍼링 논란 이후 완전 폐지되었다.]하여 입단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고교시절 무명으로 대학 1, 2년때 스카우터들은 아무도 쿠로다를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오직 히로시마의 소노다 토시히코 스카우터만 쿠로다의 재능를 눈여겨 보고 꾸준히 [[가나가와현]]의 촌구석에 있던 센슈대학의 연습장까지 찾아와서 '''지켜봐 주었다고 한다.''' 히로시마의 관심이 있었기에 본인이 성장하여 자신이 드래프트에 지명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쿠로다는 역지명으로 카프에 입단한 것. 데뷔 첫해인 [[1997년]] [[4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도쿄돔]] 선발전에 등판해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기록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역사상 4번째로 신인 데뷔전 완투승'''을 기록[* 1951년 '''스기우라 유타로''', 1952년 '''오오타카 기요시''', 1990년 '''사사오카 신지''', 1997년 '''쿠로다 히로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경기 이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는데, 많은 이닝을 먹지도 못하고 4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팀 입단 동기였던 사와자키 도시카즈[* 뇌종양으로 요절한 비운의 선수이자, 히로시마 카프 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는 불꽃의 스토퍼 [[츠다 츠네미]]의 14번을 계승한 선수였다. 첫 해에는 12승을 달성하며 [[신인왕]]을 차지하는 등 등번호에 걸맞는 활약을 하지만, 이후 부상에 시달리면서 별다른 커리어를 쌓지 못한 채 2005년 은퇴. 은퇴 후 지금까지 계속 카프의 코치를 맡고 있다.]에게 신인왕도 내주고 말았다. 2년차부터는 [[중간계투]]로 돌기도 하는 등 입지가 불안했고 6점대 ERA라는 좋지 않은 성적도 찍곤 했지만, 1999년 대륙간컵에 출전하여 [[한국]]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만]]전을 완봉으로 막는등 좋은 인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체 선수 정도의 성적을 찍던 쿠로다는 2001년부터 10승을 거두고 3점대 ERA를 찍어주는 리그 상위권의 좋은 선발투수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04년에 7승으로 잠시 주춤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많은 이닝을 던져주는 이닝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대신 2004년에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에 기여했다. 이어 2005년에는 11[[완투]]를 기록하고 15승 12패 ERA 3.17, 2006년에는 13승 6패 7완투 1.85라는 흠좀무한 괴력을 선보였다. 2006년 오프시즌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 구속이 약간 하락했지만, 2007년에도 7완투 12승 8패 3.56이라는 평균 자책점을 찍으며 분전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보낸 11시즌 통산 103승 3.69의 성적. 더구나 이것은 카프의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구장이 일본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 좌우 91.4m-좌우중간 109.7m-중간 115.8m. 그리고 펜스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2.55m). 펜스 중간에는 펜스 위에 철망을 덧댄 턱이 있는데, 외야수들이 이곳을 밟고 올라가 종종 펜스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2009년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개장 전까지 사용했다.]의 타격 친화 구장임에도 기록한 성적이란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비슷하게 투수들에겐 '헬 오브 지옥'이라는 AL 동부에서 현존 최강의 에이스로 군림한 [[로이 할러데이]]와 비견하여 '''일본의 할러데이'''라고 평하는 스카우트들도 있었다. 물론 할러데이의 싱킹 무브먼트 섞인 패스트볼 등 레퍼토리에서 여러 공통점이 보였던 것이 더 크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